오래 치료를 받는 동안 혈액 수치나 영상 결과는 자주 확인하지만, 마음이 얼마나 닳았는지는 한 번도 재어 보지 않고 지나가기 쉽습니다. 새벽에 잠이 깨어 '그냥 힘들다'는 말밖에 떠오르지 않는 날이 이어진다면, 그것은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라 오래 버텨 온 몸과 마음이 보내는 신호일 수 있습니다. 암 치료 과정에서 나타나는 심리적 소진은 진료실에서도 다루는 증상이며, 통증이나 구역처럼 확인하고 조절해 볼 수 있는 대상으로 봅니다.

같은 '힘들다'라도 원인은 한 갈래가 아닙니다. 크게 네 가지 축으로 나누어 살펴보면 다음 진료에서 이야기를 꺼내기가 훨씬 수월해집니다.

첫째, 기분의 축입니다. 예전에 즐겁던 일에도 흥미가 생기지 않고, 자책이 늘고, 하루의 대부분을 가라앉은 상태로 보내는 날이 2주 이상 이어진다면 우울(depression)의 가능성을 함께 살펴봅니다. '견디는 데 익숙해졌다'가 아니라 '견디는 것 말고 선택지가 없었다'는 느낌은, 힘이 남아 있어서가 아니라 이미 여력이 바닥났다는 쪽에 가까운 표현일 수 있습니다.

둘째, 불안의 축입니다. 결과를 기다리는 며칠, 재발에 대한 걱정, 다음 주기 부작용에 대한 예상 불안은 가슴 두근거림·손떨림·숨 가쁨·속쓰림 같은 몸의 반응으로 먼저 나타나기도 합니다. 검사 전후로만 심해지는지, 아니면 하루 종일 이어지는지를 구분해 두면 도움이 됩니다.

셋째, 수면과 리듬의 축입니다. 스테로이드나 일부 항구토제, 조절되지 않는 통증, 야간 배뇨, 낮 동안의 긴 낮잠, 병실 소음은 잠을 토막 냅니다. 잠이 무너지면 기분과 기력도 함께 무너지므로, 수면은 마음 문제와 따로 떼어 볼 수 없습니다.

넷째, 몸에서 오는 축입니다. 빈혈(anemia), 갑상선기능저하증(hypothyroidism), 전해질 이상, 감염, 영양 부족, 조절되지 않는 통증, 그리고 스테로이드나 호르몬 치료를 비롯한 일부 약물은 그 자체로 기분과 의욕을 떨어뜨릴 수 있습니다. 마음의 문제로만 보기 전에 최근 혈액검사와 복용 중인 약 목록을 함께 확인하는 편이 좋습니다.

기다리지 말아야 하는 신호도 있습니다. 죽고 싶다는 생각이 반복되거나 구체적인 방법이 떠오를 때, 스스로를 해치고 싶은 충동이 들 때, 며칠째 먹지도 자지도 못할 때는 다음 외래를 기다리지 말고 담당 의료진에게 알리거나 응급실을 이용하십시오. 한국에서는 자살예방 상담전화 109, 정신건강 상담전화 1577-0199에서 24시간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

다음 진료 전에 정리해 두면 좋은 순서입니다. ① 하루 한 줄만 기록합니다 — 잠든 시각과 깬 횟수, 식사량, 그날의 힘듦을 0~10 숫자로, 가장 힘든 시간대. ② 최근 2주 동안 달라진 점(식욕, 흥미, 집중력, 사람을 피하게 되는 정도)을 적습니다. ③ 복용 중인 약과 보충제를 빠짐없이 적습니다. ④ 최근 혈액검사 결과지를 챙깁니다. ⑤ '요즘 마음이 힘들어 도움을 받고 싶다'는 한 문장을 미리 준비해 둡니다. 0~10으로 표현하는 방식은 진료 현장에서 쓰는 디스트레스 온도계(distress thermometer)와 같은 방식이라, 짧은 진료 시간에도 전달이 됩니다.

도움을 받을 수 있는 통로는 생각보다 여러 갈래입니다. 담당 진료과를 통한 정신건강의학과·정신종양학(psycho-oncology) 협진 의뢰, 병원 사회복지팀, 지역 정신건강복지센터, 암생존자통합지지센터 등이 있습니다. 상담과 수면·불안·기분에 대한 약물, 통증 조절 재조정을 함께 쓰기도 하며, 항암제와의 상호작용 확인이 필요하므로 임의로 약을 구해 먹기보다 치료를 아는 의료진과 상의하는 편이 안전합니다.

돌보는 가족도 같은 대상입니다. 간병하는 사람의 소진은 흔히 '내가 아픈 게 아니니까'라는 말로 미뤄지지만, 잠과 기분이 무너지면 돌봄도 오래 갈 수 없습니다. 환자와 보호자가 각자 한 줄씩 적어 두었다가 같은 진료실에서 꺼내 놓는 것만으로도 시작이 됩니다.

이 글은 일반적인 정보 제공을 위한 것으로 진료를 대체하지 않습니다. 증상과 상황은 사람마다 다르므로, 판단과 결정은 반드시 담당 의료진과 상의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