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어지럽다며 소파에 주저앉던 날을 아직도 기억한다. 평소 술 한 잔 안 하시고, 등산도 꾸준히 다니시던 분이라 설마 했다. 동네 의원에서 잰 혈압이 180에 110. 간호사 선생님 표정이 살짝 굳는 걸 보고 그제야 "아, 이거 진짜구나" 싶었다. 그동안 뒷목이 뻐근하다, 잠을 설친다 하셨던 게 다 신호였던 거다.

처음엔 약 먹기를 그렇게 싫어하셨다. 한번 먹으면 평생 먹어야 한다는 말, 어디서 들으셨는지 그게 무슨 형벌처럼 느껴지셨나 보다. 근데 의사 선생님이 해주신 말이 마음에 남았다. 안경 쓰는 게 부끄러운 일이 아니듯, 혈압약도 몸을 도와주는 도구일 뿐이라고. 그 한마디에 아버지가 조금 누그러지셨다. 사실 약보다 더 힘들었던 건 식습관이었다. 평생 짜게 드시던 분한테 국물을 반만 드시라니, 거의 전쟁이었다.

우리 집이 제일 크게 바뀐 건 부엌이다. 어머니가 국에 간을 하던 손을 멈추고, 식탁 위 소금통을 아예 치웠다. 대신 마늘이랑 양파, 버섯 같은 걸로 맛을 냈는데 신기하게 한두 달 지나니까 다들 그 심심한 맛에 익숙해지더라. 라면을 끓여도 스프를 반만 넣는 게 자연스러워졌다. 가족 전체가 같이 바뀌니까 아버지도 혼자 참는다는 느낌이 덜했던 것 같다.

혈압계를 하나 사서 매일 아침저녁으로 재는 습관도 들였다. 처음엔 숫자 하나에 온 식구가 일희일비했는데, 어느 의사 분이 그러더라. 그날그날 숫자에 너무 매달리지 말고 일주일 평균 흐름을 보라고. 그 말 듣고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아침에 막 일어났을 때, 화장실 다녀온 직후엔 높게 나올 수 있으니 5분쯤 가만히 앉아 있다가 재는 게 좋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막상 일 년쯤 지나니 아버지 혈압이 130대로 내려와 안정됐다. 약 덕분이기도 하지만, 짠 거 줄이고 저녁마다 동네 한 바퀴 같이 걷는 게 컸다고 생각한다. 걷다 보면 그날 있었던 얘기도 나누게 되고, 스트레스도 풀리고. 돌이켜보면 그 어지럽던 하루가 오히려 우리 가족 생활을 통째로 점검하는 계기가 됐다. 무서운 신호였지만, 늦지 않게 알아챈 게 다행이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우리 집 이야기일 뿐이고, 약이나 식단은 사람마다 다르니 꼭 담당 선생님과 상의해서 정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