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일도 명절도 아닌 평범한 오후, 설거지를 하다가 혹은 운전을 하다가 병실의 소리가 통째로 되살아나는 일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들었던 한마디, 손을 잡았을 때의 감촉, 기계음까지 그대로 재생됩니다. 이런 일이 반복된다고 해서 기억이 고장 난 것은 아닙니다. 강한 감정과 감각이 함께 붙은 기억은 정리된 서랍에 들어가지 못한 채 남아 있다가, 비슷한 억양이나 냄새, 특정 시간대 같은 방아쇠에 걸리면 앞뒤 맥락 없이 통째로 떠오릅니다. 이를 흔히 침습적 기억(intrusive memory)이라고 부릅니다. 떠올리려고 애쓴 것이 아니라 저절로 밀고 들어온다는 점이 특징입니다.
애도는 시간이 지날수록 일정하게 옅어지는 직선이 아닙니다. 잔잔하다가 갑자기 밀려오는 파도에 가깝습니다. 1주기 전후, 계절이 바뀔 때, 고인이 늘 일하던 시간대, 병원 근처를 지날 때 파도가 높아집니다. 그래서 '이제 좀 괜찮아졌다'와 '어제 일 같다' 사이를 몇 번이고 오가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몇 달째 아무렇지 않다가 갑자기 무너지는 쪽이 더 흔합니다.
'고통 속에 돌아가셨다'는 장면이 특히 오래 남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임종이 가까운 시기에 보호자가 목격하는 변화들, 이를테면 호흡 간격이 불규칙해지거나 가래 끓는 소리가 나거나 몸을 자꾸 뒤척이는 모습은 지켜보는 사람에게 강하게 각인됩니다. 다만 임종기에는 의식 수준이 함께 떨어져 있는 경우가 많아, 보는 사람이 느끼는 고통의 크기와 환자가 실제로 경험한 것이 반드시 같지는 않다고 설명하는 의료진이 많습니다. 물론 개인차가 있고, 당시 어떤 처치와 증상 조절이 이루어졌는지는 기록으로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돌아가신 병원이나 호스피스·완화의료 기관의 사별가족 상담을 통해 마지막 며칠의 경과를 한 번 설명받아 두면, '내가 본 장면'과 '실제로 진행된 일'을 겹쳐 놓을 수 있습니다. 이 과정만으로 반복 재생이 눈에 띄게 잦아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못 해 드린 것만 떠오르는 것도 기억의 성질 때문입니다. 사람의 기억은 결과를 다 알고 난 뒤에 과거를 채점합니다. 그때는 손에 없던 정보, 이를테면 병이 얼마나 빨리 진행될지,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를 지금 쥐고서 그 시절의 선택에 점수를 매기는 셈입니다. 후회 문장이 떠오를 때마다 종이에 그대로 적고, '그때 실제로 알 수 있었던 것'과 '그때는 알 수 없었던 것' 두 칸으로 나눠 보십시오. 대부분의 문장이 두 번째 칸으로 넘어갑니다.
말할 곳이 없다는 문제는 애도에서 따로 다뤄야 할 만큼 큽니다. 가족끼리는 서로를 아끼느라 말을 삼키고, 주변에서는 '이제 그만 잊으라'는 말이 먼저 돌아오기 쉽습니다. 익명 게시판에 몇 줄 적는 일도 그 자체로 애도 작업의 일부입니다. 여기에 더해 바깥에 한 자리를 두는 방법이 있습니다. 호스피스·완화의료 기관에서 운영하는 사별가족 프로그램(추모 모임, 유족 상담)은 그곳에서 임종하지 않았더라도 문의가 가능한 경우가 있고, 거주지 정신건강복지센터에서는 사별 상담과 필요 시 연계를 제공합니다. 유족 자조모임, 직장의 상담 지원 제도도 선택지에 넣어 두십시오.
전문가의 도움을 앞당겨야 하는 눈금도 있습니다. 사별 후 대략 1년(성인 기준)이 지났는데도 대부분의 날에 그리움과 고인 생각에 사로잡혀 일상 기능이 유지되지 않을 때, 유품이나 장소를 극단적으로 피하거나 반대로 거기서 떠나지 못할 때, 감정이 마비된 듯하거나 삶의 의미가 사라졌다고 느낄 때는 지속성 비탄장애(prolonged grief disorder)를 포함해 평가를 받아 볼 시점입니다. 우울, 불면, 음주 증가, 작은 소리에도 놀라는 반응이 함께 온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무엇보다 '죽고 싶다'는 생각이나 자해 충동이 떠오른다면 시간을 두지 말고 도움을 청하십시오. 한국에서는 정신건강 상담전화 1577-0199, 자살예방 상담전화 109가 24시간 연결됩니다.
마지막으로 몸입니다. 사별 후 1년은 유족 본인의 혈압, 혈당, 체중, 수면이 함께 흔들리는 시기로 알려져 있습니다. 잠드는 시각만이라도 고정하고, 술로 잠을 청하는 방식은 새벽 각성을 부르기 쉬우니 피하십시오. 미뤄 둔 건강검진 날짜를 잡아 두는 것도 애도의 일부입니다. 기일이나 명절처럼 파도가 예상되는 날은 미리 누구와 어디서 보낼지 정해 두면 그날이 조금 덜 길어집니다.
이 글은 일반적인 정보 제공을 목적으로 하며 개별 진료나 상담을 대신하지 않습니다. 증상이나 상황에 대한 판단과 결정은 반드시 의료진 및 전문 상담자와 상의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