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그치고 공기가 맑아지면 미뤄 두었던 산책이 반가워집니다. 며칠 걷지 못하다가 오랜만에 땀이 살짝 배도록 걷고 나면 다리도 개운하고 기분도 한결 가벼워지지요. 다만 암 치료를 받고 있거나 마친 분들에게는 '비 온 뒤'라는 상황이 한 가지를 더 살피게 합니다. 바로 젖어서 미끄러운 길과, 그 위에서 생길 수 있는 미끄러짐·낙상(fall)입니다.

왜 같은 길인데 더 조심해야 할까요. 항암제 가운데 일부는 손발 끝 감각을 무디게 하는 말초신경병증(CIPN)을 남깁니다. 발바닥으로 느끼는 미끄러운 느낌이나 턱의 높이가 예전만큼 또렷하지 않으면, 몸이 균형을 잡는 반응도 반 박자 늦어집니다. 또 빈혈(anemia)이나 수분 부족, 일부 혈압·진정 계열 약은 자리에서 일어설 때 핑 도는 기립성 어지럼(orthostatic dizziness)을 일으켜 걷다가 휘청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미끄러졌을 때의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뼈로 전이가 있거나 오래 치료로 뼈가 약해진 경우에는, 크게 다치지 않을 것 같은 가벼운 넘어짐에도 골절(fracture)이 생길 수 있습니다. 혈소판(platelet) 수치가 낮은 시기에는 부딪힌 자리에 멍이 크게 들거나 피가 잘 멎지 않기도 합니다. 그래서 '얼마나 세게 넘어졌나'보다 '지금 내 몸이 어떤 상태인가'를 함께 생각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발밑을 지키는 방법은 어렵지 않습니다. 비 온 직후에는 젖은 잔디·낙엽·이끼 낀 돌·페인트칠한 바닥처럼 유난히 미끄러운 곳을 피하고, 물이 잘 빠진 평평한 포장길을 고르세요. 바닥 무늬(접지력)가 살아 있는 신발을 신고, 필요하면 등산스틱(트레킹 폴)으로 지지점을 하나 더 만드는 것도 좋습니다. 어두워지기 전 밝을 때 걷고, 시작 전 몇 분 준비운동으로 몸을 데우고, 물을 조금씩 나눠 마시면 어지럼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됩니다. 휴대폰을 챙기고 가족에게 대략의 경로와 돌아올 시간을 알려 두면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할 수 있습니다.

걷는 동안 몸이 보내는 신호도 함께 읽어 주세요. 운동으로 나는 땀·가벼운 숨참과 달리, 식은땀이 나면서 가슴이 조이거나, 눈앞이 어질하고 다리에 힘이 풀리거나, 한쪽 종아리가 갑자기 붓고 아프다면(정맥혈전색전증의 신호일 수 있습니다) 걸음을 멈추고 쉬는 것이 맞습니다. 증상이 가라앉지 않으면 무리해서 완주하려 하지 말고 도움을 청하세요. 반대로 며칠 걷지 못한 공백은 큰 문제가 아닙니다. 죄책감을 가질 일이 아니라, 짧게라도 다시 시작하면 됩니다.

이 글은 일반적인 정보를 전하기 위한 것으로, 개인의 진료를 대체하지 않습니다. 운동의 강도와 방식, 낙상 위험을 어느 정도로 조심해야 하는지는 사람마다 다르므로, 걷기 계획을 세우기 전에 담당 의료진과 상의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