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사람을 오래 돌보다 보면, 어느 날 문득 '내가 왜 이러지' 싶은 순간이 찾아옵니다. 점심에 무엇을 먹었는지 떠오르지 않고, 방금 하려던 일이 생각나지 않고, 익숙하던 집안일 하나를 빼먹기도 합니다. 나이가 많은 것도 아닌데 이런 일이 반복되면 '혹시 내 머리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닐까' 하고 덜컥 겁이 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런 건망증은 대개 뇌가 병든 신호라기보다, 지나치게 많은 것을 감당하고 있다는 신호에 가깝습니다. 오랜 긴장과 걱정은 몸속 스트레스 호르몬(코르티솔, cortisol)을 높은 상태로 유지시키고, 이는 새로운 정보를 저장하고 떠올리는 기억 기능을 일시적으로 무디게 만듭니다. 잠이 부족하면 낮 동안 겪은 일이 기억으로 '정리·저장'되는 과정이 방해받고, 여러 일을 동시에 신경 쓰다 보면 애초에 정보가 제대로 '입력'되지 않습니다. 점심 메뉴처럼 사소한 일은 마음이 다른 곳에 가 있는 사이 아예 기록되지 않은 것입니다.
'잊고 싶은 일은 또렷한데 정작 기억해야 할 일은 흐릿하다'는 느낌에도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 뇌는 감정이 강하게 얽힌 사건을 더 진하게 새기고, 감정이 실리지 않은 일상적 정보는 쉽게 흘려보내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힘든 장면이 자꾸 떠오르고 소소한 일은 놓치는 것은, 당신의 정신력이 약해서가 아니라 뇌가 원래 그렇게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이런 '머릿속 안개'는 대부분 되돌릴 수 있습니다. 다만 몇 가지 신호가 함께 있다면 한 번쯤 진료로 확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익숙한 길에서 길을 잃거나, 늘 하던 일을 하는 방법 자체를 잊거나,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 대화가 이어지지 않거나, 시간이 갈수록 점점 심해지는 경우입니다. 또 갑상선 기능 이상, 빈혈, 비타민 B12 부족, 우울·불안, 수면무호흡, 복용 중인 약처럼 기억을 흐리게 하는 '치료 가능한 원인'이 숨어 있을 수 있어, 이런 부분은 검사로 가려낼 수 있습니다.
스스로를 돌보는 방법은 의외로 단순합니다. 첫째, 부족한 잠부터 조금씩 되찾으세요. 둘째, 기억을 머리에만 의지하지 말고 메모·휴대폰 알람·달력·체크리스트 같은 '바깥 기억장치'에 맡기세요. 이는 무능의 표시가 아니라, 지친 뇌의 부담을 덜어주는 현명한 방법입니다. 셋째, 한 번에 한 가지씩 하려고 해보세요. 여러 일을 겹쳐 하면 무엇 하나 제대로 입력되지 않습니다. 자격증 공부처럼 집중이 필요한 일은 짧게 나눠 반복해서 익히는 편이 지금의 몸과 마음에 더 맞습니다. 무엇보다, 이런 자신을 '한심하다'고 탓하지 마세요. 그것은 게으름이나 노화가 아니라, 당신이 그만큼 많은 것을 짊어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 글은 이해를 돕기 위한 일반적인 정보이며, 개인의 진료를 대체하지 않습니다. 건망증이 걱정되거나 위에 적은 신호가 함께 나타난다면, 반드시 의료진과 상의해 원인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