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암 치료를 받다 보면 백혈구, 특히 호중구 수치가 뚝 떨어지는 시기가 옵니다. 이른바 면역이 바닥을 치는 때죠. 이럴 때 의료진이 "당분간 음식 조심하세요"라고 말하면, 막상 집에 와서 뭘 먹어야 할지 막막해집니다. 평소엔 몸에 좋다고 챙기던 생채소, 갓 짠 주스, 발효식품이 오히려 위험해지는 시기라 그렇습니다. 무균식이라고 하면 거창하게 들리지만, 핵심은 단순합니다. 균이 많이 묻어 있을 수 있는 음식, 익히지 않은 음식을 피하고 충분히 가열한 음식을 먹는 것. 그게 전부예요.
가장 먼저 머릿속에 넣어둘 기준은 '날것은 일단 멈춤'입니다. 회나 육회는 말할 것도 없고, 샐러드처럼 생으로 먹는 채소, 껍질째 먹는 과일도 이 시기엔 조심해야 합니다. 채소는 푹 익혀서, 과일은 사과나 배처럼 두꺼운 껍질을 깨끗이 깎아 먹는 쪽이 안전하고요. 딸기나 포도, 블루베리처럼 표면이 울퉁불퉁해서 세척이 어려운 과일은 잠깐 미뤄두는 게 마음이 편합니다. 견과류도 의외로 곰팡이 독소 위험이 있어서, 면역이 낮은 동안에는 개봉한 지 오래된 봉지나 껍질째 든 것보다 밀봉 포장된 가공 제품이 낫습니다.
유제품과 발효식품은 사람들이 가장 헷갈려 하는 영역입니다. 살아있는 균을 일부러 넣은 음식들이니까요. 생치즈, 떠먹는 생요구르트, 살균하지 않은 우유, 그리고 잘 익은 김치나 젓갈류는 면역이 회복될 때까지 잠시 거리를 두는 편이 좋습니다. 대신 멸균 우유나 가열 살균을 거친 가공 치즈, 끓여서 익힌 김치찌개처럼 한 번 더 열을 가한 형태라면 한결 안심이 됩니다. 같은 김치라도 생으로 먹느냐 끓여 먹느냐가 갈리는 거죠.
조리와 보관 습관도 식재료 고르기만큼 중요합니다. 아무리 좋은 재료를 골라도 도마와 칼을 날것 손질에 쓴 그대로 익힌 음식에 댄다면 의미가 없으니까요. 고기 손질용과 채소·과일용 도마를 따로 쓰고, 음식은 만든 즉시 먹되 식어버린 건 다시 충분히 데워서 드세요. 상온에 두세 시간 방치된 반찬, 정체를 알 수 없는 배달·뷔페 음식, 정수가 확실치 않은 생수나 얼음은 이 시기엔 피하는 게 좋습니다. 물도 가능하면 한 번 끓여 식힌 물이 가장 든든합니다.
이렇게 적어놓으면 먹을 게 하나도 없어 보이지만, 사실 따뜻한 밥과 잘 익힌 국, 푹 끓인 죽, 두부조림, 계란찜, 익힌 나물처럼 우리가 평소 먹던 집밥 대부분이 그대로 안전식입니다. 너무 빡빡하게만 생각하다 보면 입맛까지 떨어지니, 익혀서 갓 만든 따뜻한 음식이라는 큰 원칙만 잡고 그 안에서 드시고 싶은 걸 고르면 됩니다. 무균식은 평생 가는 식단이 아니라 수치가 낮은 그 짧은 고비를 잘 넘기기 위한 일시적인 조치예요. 면역이 회복되면 좋아하던 생과일도, 잘 익은 김치도 다시 돌아옵니다. 다만 본인의 수치와 상태에 따라 허용 범위가 다를 수 있으니, 구체적인 식단은 담당 의료진이나 병원 영양팀과 한 번 맞춰보시길 권합니다.